2012년 10월 19일 메모中
얼마전에 지인이 저에게 Ted 강의 한편을 링크해줬어요.
그리고 그 테드강의는 브르네 브라운의 '수치심에 귀 기울이기'라는 제목의 영상이었습니다.
사실 아무생각없이 앞부분을 보다가 뭔가 와닿는 내용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인문학 강의들에 당시엔 싫증을 내던 때라 대충
건성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걸 왜 보라고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싶어서 급한 마음에 스크립트를 쭉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감상평을 읽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한가지 문장을 봤어요
"Vulnerability is the birthplace of innovation, creativity and change"
이라는 문장이었죠.
아무튼 이 문장을 보고 다시 한번 쭉 테드 영상을 보다가 여러가지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가더군요.
수치심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의 긍정적인면을 말이죠.
보통 한국인들은 유교중심의 사고체계가 확립되어 있고 그래서 자신의 수치심을 드러내는것을 영미권의 사람들보다 훨씬더 부끄러워합니다. 이는 결국 친한 이들에게만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고 오히려 그 친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가중 시키거나 에너지를 빼앗는 형태가 되어버립니다. 보통 이런 유형의 수치심은 자신이 이미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듣는 이도 받아들이는 이도 평행선을 달리게 됨을 알게되는 거죠.
하지만 공공의 게시판에서 수치심을 드러내는건 다르다고 봅니다. 그에 맞는 전문가들이 있고 전문적인 조언도 가능해지죠. 그리고 이는 비단 명확한 형태의 수치심이 아니라 토론과정에서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많은 이들이 정치를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정치 논쟁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죠. 왜냐면 자신의 논의가 공격당하는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대로 모르고 이야기를 하게되면 정확한 이야기로 반박되는건 당연한겁니다. 그걸 부끄러워해선 안되는거라고 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반대로 생각을 해봅시다.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와 그 분야에 관심은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진 않은 이가 논쟁을 벌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자가 무조건 옳은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제대로 알지못하는것에서 새로운 관점이 발견되기도 하는거니까요. 실수가 우연한 발견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후자의 사람들과 토론을 할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만 옳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토론에 임한다면 그 사람은 발전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자의 사람이 그럼에도 옳다면 이렇게 반박하면 됩니다. 그렇게 옳은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사회 시스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하지 않을까라고 말이죠.
즉 모르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