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일이 많음에도 다 내팽겨친채 결국 프랙티스 8시즌을 끝까지 달렸다. 내가 이드라마를 본 첫번째 동기는 순전히 보스턴리갈에 "앨런쇼어"가 등장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프랙티스 8시즌을 처음 본 내인상은 앨런의 지금보다 마른 얼굴외엔 조금도 정이가지않았다. 조악한 화면과 진심으로 거지같이 느껴진 오프닝을 차지하더라도 극 내내 전개되는 무거운 분위기와 거기다 치명적으로 에피소드전개임에도 불구하고 1에피로는 끝나지않는 길이까지... 이 드라마는 단지 내가 보스턴 리갈의 광팬이고 앨런쇼어의 광팬으로써 어쩔수없이 보아야할 고역인거같았다.
 그러나 지금 8시즌 22 ep을 보고나서는 이상하게도 앨런의 마지막 모습보다 전혀 내가 모르던 바비 -이 에피에선 그것도 잠깐 얼굴을 비추는데 불과한-가 자신의 로펌으로 돌아와 혼자 쓸쓸이 책상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장면이 계속해서 기억속에 지워지지않는게 아닌가. 인정해야겠다. 사실 앨런은 프랙티스라는 드라마에 있어서는 정말 어울리지않는 캐릭터인거같다. 심각하고 진중한 다른 캐릭터들과 전혀 어울리지않는 이 캐릭터를 기존의 프랙티스팬들이 싫어했던 이유를 어쩌면 어렴풋이는 이해할것만 같다. 내가 비록 이 드라마 전체를 본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시즌의 피날레를 보면서 사실 프랙티스를 1시즌부터 달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러나 난 아마 프랙티스를 보진 않을것이다. 난 사실 현실의 무거움이나 현실의 추악한 모습을 시종일관 무겁게 전달하는 이 드라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무척이나 보고싶음에도 말이다. 그것은 내가 HBO의 양대 걸작드라마인 "식스핏언더"를 1시즌만 보고 도중하차했거나 "소프라노스"를 7편을 보다가 더 이상 달리지못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난 이들 걸작드라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에게 이 드라마들에서오는 감정들은 내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의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느정도 "균형감각"을 지닌 보스턴리갈같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센스있고 시종일관 유머러스하지만 아픈 곳도 나름 찔러주는 드라마말이다. 이는 요즘 하우스에서도 등장한다. 보스턴리갈이 현실의 거시적인 부분에서 나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하우스는 개인적인 혹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나는 물론 이런 드라마를 좋아한다.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영리한 드라마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드라마들이 진중함과 직설을 그대로 지니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잔혹한 경험이며 가끔은 프로파간다적이다. 확실히 나에게 드라마는 지적 유희이며 자기 성찰이다. 다만 그런것들이 남들에 의해 억지로 강요되길 원하지 않을 뿐. 나에게 그래서 걸작들은 너무 무겁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현실 타협이다. 현실만 존재하기엔 우리 현실은 너무나 무겁다. 그래서 이 현실을 비춰주는 매체-여기서는 드라마-엔 "판타지"적인 면이 꼭 필요하다. 그것은 내 취향문제이며 걸작들의 "솔직함"을 욕할 생각은 없다. 결국 이글은 구구절절 내가 걸작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장황한 변명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결론에서 확실히 도출할수 있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프랙티스라는 드라마는 내 취향의 드라마는 결국 아니었지만 "걸작 드라마"임은 분명하다는 것.

Ps. 한국말 밖에 알아 먹지 못하는 비자발적 애국주의자에게 가뭄과도 같은 자막을 제작해서 이 멋진 드라마를 보게 해준 자막제작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오늘 방문자) (- 어제 방문자) (- 총 방문자)
*s e a r c h
Category openCategory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