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황우석 사건과 관련하여 자주 회자되는 것이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그냥 드레퓌스사건이 뭔지 궁금하신분들만
읽어보시길. 그리고 앞으로 블로그에선 황우석교수관련 내용들을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에 관한 리플이나 코멘트 역시 일절 사양합니다.
드레퓌스 사건
[8페이지 분량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인은 익명이었으며,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 문서인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 대사관을 감시하고 배반자를 색출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모 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이 참모 본부 내에 있는 자이거나 최소한 그런 자와 가까운 연관을 가진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수사를 시작했다.
시민 혁명의 대명사인 '프랑스 대혁명'의 나라, 인류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가져다준 민주주의의 본고장 프랑스에, 엄청난 불명예와 아울러 내전을 방불케 하는 사회적 갈등을 휘몰고 온 드레퓌스 사건은 이처럼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한 평범한 유태인 장교에 대한 부당한 박해로써 프랑스인 전체를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시킨 후 마침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과 양심이 거짓과 음모를 굴복시키는 거대한 드라마로 종결되었다.
드레퓌스는 독일 국경 가까운 알자스 지방 밀조우에서 방직 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가 11살 되던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비참하게 패배함으로써 알자스는 독일 영토로 병합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며, 또 때로는 불의가 정의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가족들도 기꺼이 그의 뜻에 찬동했다. 드레퓌스는 말수가 적고 성실한 타입의 인간이었지만 약간은 재미가 없고 고지식한 성격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 생활과 군 생활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과 모욕을 당했지만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고, 마침내 프랑스군 참모 본부의 수습 참모로 등용됨으로써 착실히 군인의 길을 밟아나갔다.
그는 31세 된 1890년에 대위가 되었으며 '뤼시 아다마르'라는 유태인 여성과 결혼했다. 가냘프고 온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의 뤼시는 고지식한 드레퓌스를 매우 편하게 해주는 정숙한 아내였으며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이렇듯 드레퓌스 일가는 매우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군 참모본부가 이 평온한 가정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밀어넣고 말았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스파이로 지목해버렸다.
물론 이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유태인에 대한 법률적 차별 대우를 폐지한 나라였지만 반유태주의자들은 사회 각계 각층 속에 뿌리깊게 존재했고, 특히 군부와 같은 보수 집단 안에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명세서'의 필적은 드레퓌스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평소 공공연하게 반유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신문들이 이 사건을 터뜨렸다. 참모 본부의 장교가 반역죄를 범하여 체포된 사건을 공개하라고 들고나선 것이다.
드레퓌스에 대한 온갖 날조된 혐의와 근거없는 추측, 그가 했다는 스파이 행위에 대한 터무니없이 과장된 소문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만일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참모 본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형국이었다.
마침내 드레퓌스는 1894년 12월, 군사법정의 비밀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태를 빨리 수습하는 데 혈안이 되어 여러가지 문서를 날조하여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다음, 그가 그것에 대해 진술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버렸다.
반유태주의 신문들은 "드레퓌스는 프랑스 국민을 파멸시키고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는 국제적 유태인 조직의 스파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사형을 요구했다. 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래도 수긍하지 않는 변호사들에게는 "이것은 중대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엄청난 거짓말로 협박했다. 아무튼 드레퓌스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유죄를 선고받았고 수많은 군중이 보는 가운데 불명예 퇴역식을 치르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1895년 2월 21일 밤, 드레퓌스는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도'라는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그는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높은 담장이 두 겹으로 둘러싼 조그만 돌감방에 혼자 수감되었는데 스물네 시간 감시를 받는 것은 물론이요, 밤에는 두 발에 두 겹의 족쇄까지 채워져야 했다.
살인적인 무더위와 이토록 비인간적인 감금 상태에서 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살에의 유혹과 싸웠다. 아내 뤼시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믿음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위안이었다.
무죄라는 그의 호소는 절실했지만 무심한 세상 사람들은 드레퓌스를 잊어버렸다. 나중에는 가족과의 편지 왕래마저 금지되었다. 아내 뤼시와 형 마티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함께 유배지에서 살게 해달라는 뤼시의 청원도 기각되었다.
그는 1899년 6월, 재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4년이 넘는 긴 세월을 이 악마도의 형무소에 갇혀서 보내야 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전체, 나아가 전세계를 경악케 한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흘러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드레퓌스라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또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와 군사 전술학교 동창생으로서 정의감과 책임감이 매우 강하고 영민한 장교였다.
그는 이 엄청난 진상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에스테라지를 체포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상관들은 자신과 참모 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다. 그는 칭찬 대신 질책을 받았다.
피카르 중령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휴가를 얻어서 변호사를 만나 이 사실을 알렸고, 이것은 다시 한 상원의원에게 전해졌다. 만일 피카르 중령이 진실을 발견했을 때 참모 본부 지휘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반역자 에스테라지가 체포되고 드레퓌스라는 한 무고한 장교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위신을 국가 안보와 동일시한 군 고위층의 어처구니없는 아집과 독선 때문에 사건은 눈사태처럼 커져갔다.
드레퓌스 대위의 형인 마티외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의 의혹을 일소하기 위해 그 증거를 공개하자"는 속임수 기사를 한 신문에 싣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내 뤼시는 남편이 비밀 군사 법정에 제출된 증거를 보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와 상원의원은 진상을 밝힐만한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유태인과 한통속이라는 비방과 모략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던 중 참모 본부의 입장을 옹호하며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데 앞장섰던 <르 마탱>지가 특종을 터뜨렸다. 문제의 '명세서' 사본을 입수하여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사태는 심각해졌다.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명세서' 사본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사본은 슈바르츠코펜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참모 본부 정보국 요원에게 도난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명세서'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첩자의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에스테라지는 초조해졌다. 그는 외관상 훌륭한 군복무 기록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노릇을 하거나 돈 많은 미망인을 꼬드겨 만든 돈으로 사치와 방탕을 즐기는 비열한이었다. 그는 자신의 범행이 탄로나지 않도록 온갖 음모를 꾸미고 다녔다. 참모 본부는 진상을 알면서도 에스테라지와 한통속이 되어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명세서'가 드레퓌스의 필적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고, 에스테라지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한 증권 브로커가 형 마티외를 찾아가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알려주었다. 마티외는 즉시 에스테라지를 범인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조사를 시작하고서도 질질 끌기만 할 뿐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신문지면에서는 불꽃튀는 논쟁과 갖가지 추측, 허위 보도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신문들은 당국을 두둔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요구는 군부, 그리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파멸시키려는 유태인 조직의 국제적 음모이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군부의 위신과 신망을 실추시켜서는 안되고, 유태인은 군과 공직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편파 보도 속에서도 최초로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을 주장한 한 신문이 있었다. <르 피가로>지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반유태주의 신문의 아우성에 묻혀버렸다. 에스테라지는 하루종일 신문사에 들어앉아, 있지도 않은 국제적 유태인 조직에 대한 날조된 정보를 끝없이 흘려보냈다. 하원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어지럽히는 악질적인 선동꾼들을 발본색원하자고 결의했다.
에스테라지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그의 간첩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피카르 중령이 변호사에게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것은 즉각 전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전 유럽의 신문들은 "이제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도했다.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유명한 정치가인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 신문들을 읽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자유와 지성의 나라 프랑스는 전세계의 조소를 한몸에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 젊은 신문기자는 "사기꾼들이 사기를 예찬했고 협잡꾼들은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고 개탄했다.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공화제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으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재심 요구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 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보고 구경만 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계급이 뒤늦게 여기에 가담하였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세계의 지식인들도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 재심 요구파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드레퓌스의 미래는 여전히 깜깜한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1897년 1월 13일, 절망의 분위기를 일거에 몰아내는 대폭풍우가 몰아쳤다. 정치가 클레망소가 운영하는 신문인 <로로르>지에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실은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논설을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워 썼다.
이 글의 막강한 호소력은 협잡과 혼란, 날조와 비방의 연막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군부의 과실을 은폐하려 한 참모 본부 무리들과 국방부의 장군들,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 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번째 군사 재판 및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번째 군사 재판을 무섭게 질타하였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왔고 행복에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다만 청천백일하에 나를 심문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지는 이날 무려 30만 부나 팔려나간다. 세계 각지에서 3만 통의 편지와 전보가 날아와 졸라의 호소를 환영했다.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지를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만일 드레퓌스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그를 죄인으로 몰고간 참모 본부와 국방성, 군사 법원이 범죄자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각지에서는 대규모의 군중이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유태인이 살상당하고 유태인 상점이 짓밟혔다.
재심 반대파의 선동에 흥분한 부랑한 하층 계급이 폭동의 선두에 섰다. 그야말로 집단적인 정신적 광란이었다. 졸라의 집으로 흥분한 군중이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양심적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졸라에게 보내는 찬사를 성명서로 만들어 서명을 했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내팽개쳤다.
책도 읽지 않았으며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을 벌이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즉 프랑스라는 드라마의 무대에서 전 세계의 문명인들이 관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스스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열병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에밀 졸라는 군법 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 운동이 조직되었다.
재심 요구파에 가담한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났고 드레퓌스를 두둔한 정치가는 다음 선거에서 대부분 낙선했다. 곳곳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열병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 8월 30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 사태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일찌기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 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면도날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다. 이로써 참모 본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재심 요구파는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자 '군국주의자와 반유태주의자들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런던의 한 출판사에서 돈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자신은 이중 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것이 내용이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일제히 참모 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드레퓌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직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의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브르타뉴의 군형무소로 돌아왔다. 졸라도 망명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으며, 또한 피카르 중령도 감옷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의 길은 머나먼 가시밭길이었다.
재심이 시작되었다. 드레퓌스는 단지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밖에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변호사 라보리는 법정으로 가는 길에 괴한의 저격을 받아 부상했고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거짓말을 계속했다. 군사 법정의 심판관들은 '정상 참작'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금고 10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표결의 결과는 5:2로 유죄였다.
졸라는 다시 한번 펜을 들었다.
"이것이 정상 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에 대한 정상 참작이 아니라 심판관들에 대한 정상 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 참작을 한 것이다. 이같은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의 타협을 했다는 고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외침은......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내일이면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어안이벙벙해져서 물을 것이다.....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면 훌륭한 병사 외에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전세계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항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이듬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를 보이코트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코트 결의가 곳곳에서 채택되었다. "범죄자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프랑스다"라는 사설들이 세계 언론을 장식했다.
장 조레스, 클레망소 등 진보적인 정치인의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시켰다. 그는 자유를 되찾았고 아내 뤼시를 포옹했다. 졸라는 라보리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이제 지저분한 방법으로 정직한 사람과 도둑에게 똑같은 특별 사면을 내린 것입니다."
드레퓌스가 특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동안 진실의 승리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것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피카르 중령까지 곤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수년간 계속된 소란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드레퓌스를 잊고 싶어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행동으로 인해 영원한 세계인의 양심이라는 찬사를 받은 졸라는 1902년 우연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석탄 난로의 가스가 빠지지 않은 탓으로 잠자던 중 사망한 것이다. 타살의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아나톨 프랑스가 장례식 조사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프랑스의 사회 정의, 공화국의 이념, 자유로운 정신을 질식시키기 위해 손잡은 모든 폭력적 억압적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의 웅변은 프랑스를 잠깨웠다", "운명과 그의 용기가 그를 높은 곳으로 밀어올려 그로 하여금 한 순간 인류의 양심이 되게 하였다".
드레퓌스는 <악마도 일기>를 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책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 어떤 책도 현실 그 자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1906년 7월 12일, 최고 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사건의 막이 내린 것이다. "발표하면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참모 본부가 그토록 외쳐온 '중대한 기밀 문서'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협잡과 음모를 위해 날조된 허위 증거 문서들만이 쓰레기더미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졌을 뿐이다.
드레퓌스는 같은 해 7월 22일, 사관 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티외와 아들 피에르를 양옆에 세웠다.
그들이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몰려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들고 경의를 표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번쩍 들었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두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여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35년 7월 11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조국 독일에 충성스러웠던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인간 드레퓌스의 고난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1917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프랑스 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들아봐라 프랑스인들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모두가 거짓이고 모략이다. 그에겐 티끌만한 잘못도 없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드레퓌스, 양심적이고 강직한 군인 피카르 중령, 진실의 승리를 향해 가시밭길을 택한 용기있는 지성인 에밀 졸라, 현명하고 정열적인 정치인 클레망소, 그리고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운 수없이 많은 이름없는 사람들, 해외에서 지원한 각국의 양심인들, 이들 모두는 사기와 협잡, 무지와 편견의 책동을 분쇄하고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공화제를 지켜낸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힘을 모아 쟁취한 드레퓌스 사건의 승리는 몇 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우선 거의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신체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 등 인권 존중의 가치를 몸으로 터득하게 되었다. 더욱이 군부의 이익과 위신을 국가의 이익 또는 국가 안보와 동일시한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민간 우위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참여가 더욱 폭넓게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졸라는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같은 교훈은 곧 전인류의 정신적 자산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크게 보아 대립하는 두 세계관의 대결이었다. 드레퓌스라는 특정한 인물, 혹은 에스테라지라는 악당의 존재가 이같은 대결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닐 것이다.
재심 반대파는 주로 공화제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 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또 무시해야 된다고 믿는 군국주의자들 혹은 국가주의자들, 유태인의 음모로부터 조국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축출하고 말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 차별주의자 혹은 편협한 가톨릭주의자들, 어떤 형태의 사회적 갈등도 유해하다고 확신하는 대소유자 즉 자본가들이었다.
반면 재심 요구파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시민 혁명과 공화적의 정신 위에서만 국가의 번영과 안전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 인권과 진실을 짓밟는 이상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법률가들, 어떤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에도 반대하면서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추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재심 반대파의 세계관은 발전하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놓으려 하고 인간을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아닌 종속물로 보는 반동적 세계관이다. 참모 본부와 국방성의 장성들, 에스테라지 같은 사람들은 이같이 퇴행적이고 사멸해가는 세계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약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패배했다.
반면 에밀 졸라와 피카르 중령, 클레망소와 변호사 라보리 등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이 된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성장해가는 세계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조국 연맹과 프랑스 행동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반유태주의, 군국주의자들과, 인권 옹호 연맹을 중심으로 하는 반군국주의, 반교권주의자들로 양분되었는데, 전자(前者)는 샤를 모라스가 창설한 를 선봉으로 반동적인 민족주의자와 왕당파를 대변하는 반드레퓌스파이고, 후자(後者)는 장 조레스를 중심으로 연합 전선을 이룬 사회주의 연합의 선봉으로서 드레퓌스파였다.
구체적인 국가 공동체와 전통 및 질서에 충실하려는 전자와, 정의와 이성을 지상으로 삼는 합리주의적 입장에 섰던 후자의 싸움에서, 결국은 좌익이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출처:france.co.kr/literature/dreyfus.htm)